본문 바로가기
보며 느끼며

그날의 산행 / 장광규(張光圭)

by 청심(靑心) 2005. 9. 21.

 

11월 하순이었으니 겨울이라고 해야겠다. 아마 초겨울이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단풍도 떨어지고 있었으니 가을 기분도 났다. 늦가을의 허무하고 쓸쓸한 느낌이 드는 그런 계절이다. 일요일 오후 길을 나선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역에서 내린다. 방 안에 앉아있자니 답답해 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것이다. 

남산에 오르기로 작정한다. 남산을 오른 적은 몇 번 있다. 그때는 좋은 기분으로 올랐다. 그러나 이번은 좋은 기분으로
올라온 게 아니다. 지금 몇 달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생각해 보거나 잊어버리려고 산을 오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관악산으로 갈까 망설이다 이곳으로 왔는데 그곳으로 갔더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얼마쯤 오르다 필동을 내려다보니 푸른 유니폼을 입고 근무했던 군부대가 언제 헐렸는지 그 자리에 기와집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언뜻 소문으로 들은 것도 같은데 근무했던 부대가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을 직접 눈으로 보니 허무하기만 하다. 시내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자세히 보고 싶은 생각도 없다. 걷고는 있어도 머리는 복잡하다.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는데 산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이 가끔 있다. 

쉬지 않고 계속 오르니 정상이 나온다. 팔각정에서 서울시내를 한번 둘러보고는 걸음을 재촉한다. 지금까지는
오르막길이었는데 이제는 내리막길이다. 내려가기를 시작했을 때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이야기해 준다. 얼마쯤 더 갔을 때 이번에는 집에서 전화가 온다. 회사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는 내용이고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이다. 산에서 전화를 받다니 옛날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자주 올랐던 남산이기에 낯설지가 않다. 추억을 떠올리며 계속 내려가다 보니 장충단공원이 나온다. 거기서 더 걷기로 한다. 장충동으로 해서 이쪽저쪽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동대문운동장이 나온다. 그 근처에서 점심식사를 해결한다. 식사를 하고 막 나오는데 옛날에 같이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이 휙 지나간다. 아는 체 할까 하다가 회사가 어수선한데 이야기할 건더기가 없어 그만 두기로 한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걸 실감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며 어서 들어오라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리며 신길동행 버스에 오른다. 

이제 어느 정도 결심을 한 상태다. 회사를 더 다녀야 하느냐? 그만두어야 하느냐?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을 설친
수개월, 나뿐만 아니라 아내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민했던 일들을 정리하기로 한다. 막막하기도 하고 뚜렷한 대책도 없지만 회사를 그만 두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동안 피가 마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평생일터로 생각한 곳을 그만 두기로 결정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비록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개인의 생활도 어려워졌지만 누구를 원망할 상황도 아니다. 이번 산행에서도 느낀 게 있다.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오르막길이 있고 언젠가는 그곳에서 내려가는 내리막길이 있지 않은가. 설령 산꼭대기에 못 오르고 중턱에 왔더라도 이제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밖에서는 마음의 결정을 했지만 아직 회사에서는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가 없다. 잠을 설치고 뒤척이며 고민은 계속된다.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도 잠은 오지 않는다. 몸이 나른하고 신경만 날카로워진 것 같다. 누구한테 쫓기는 신세도 아니고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해야만 하나? 빨리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고 싶다. 새해가 온다고 들떠있는 2000년 마지막 날 정들었던 회사와 조용히 이별을 한다. 

                                                                           2000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