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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며 느끼며

촌평 3

by 청심(靑心) 2005. 2. 19.

 

▣ 장광규 님께 드리는 몇 마디 쓴소리 - 안도현 


장광규 님, <와이즈북>을 통해 저한테 전해져 온 [체감온도] 외 4편의 시를 잘 읽었습니다. 지금 저희 집 창밖에는
올해의 첫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첫눈이 내린다고 해서 무어 그리 달라질 것도 없는데, 마음 한쪽에 쓸쓸한 설렘 같은 게 자꾸 쌓입니다. 그것은 마흔을 넘기고도 아직 저라는 인간이 철이 덜 들었다는 뜻이겠지요. 시를 읽어보니, 장광규 님은 쏟아지는 눈을 보고 "쌀이라면 좋겠다" 하면서 보릿고개를 넘어오신 분이군요. 5.16이 일어난 해에 이 세상에 태어난 저는 사실 보릿고개를 말로만 들었을 뿐입니다. 운 좋게 절대적 궁핍을 겪지는 않았지요. 그렇다면 장광규 님은 저보다 먼저 세상을 살아오신 분이 분명합니다. 감히 짐작컨대 아마 4~50 대 부근을 통과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시를 이야기해야 하는 자리에서 왜 나이를 들먹거리는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생리적 나이에 상관없이 시란 삶의 열정의 산물이란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열정은 이십 대 젊은이들만 소유하는 게 아닐 것입니다. 청년의 열정이 있다면 중장년의 열정도 있게 마련이지요. 물론 열정의 빛깔은 각기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저는 장광규 님의 시에 대한 열정에 우선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이번의 다섯 편중에 두 편이 시로 쓴 자신의 시론이라고 할 수 있군요. 그것만 보아도 시를 향한 열정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웃음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여운이 남는 글을 쓰고 싶다 삶의 냄새가 풍기는 글을 쓰고 싶다 꾸밈이 없는 소박한 글을 쓰고 싶다 평범함 속에 느낌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독백] 뒷부분 우리들의 소박한 일상의 모습을 꾸밈없는 순수함으로 시(詩)라는 포근한 그릇에 곱게곱게 담아보고 싶다 --[참 부럽다] 뒷부분 제가 읽어  장광규 님의 시는 그야말로 삶의 냄새가 풍기고, 소박하고, 꾸밈이 없고, 순수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웃음과 여운이 오래도록 남지는 않습니다. 스스로도 "글을 쓰겠다고 글을 써보지만 글다운 글을 발견할 수가 없다/아무런 발전이 없다/신선한 맛이 나지 않는다/조금씩의 변화도 없다/언제나 틀에 박힌 똑같은 모습들이다"([독백])이라고 토로하고 있듯이 그것은 장광규 님이 시에서 꿈꾸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독자에게 그 꿈이 전달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장광규 님의 시가 지나치게 일방적인 독백체로 짜여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독백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데 더없이 좋은 양식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시가 그저 독백만을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리라 생각합니다. 시의 운명은 일기나 편지의 운명과는 분명히 다른 데가 있습니다. 일기나 편지라는 그릇에는 독백만을 아무런 여과 없이 담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의 그릇에는 독백뿐만 아니라, 독백을 구체화하는 묘사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서의 발견이 함께 어울려 있어야 합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 어머니 어머니는 시인이시다 좋은 일이 있을 땐 더욱 기쁘게 슬픈 일이 있을 땐 더욱 슬프게 적절한 표현으로 간결하게 하시는 말씀이 꾸밈없는 시어가 되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어머니는] 앞부분 복숙아, 니 핵교 그만둔 것 징검다리를 건너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그냥 우두커니 서지고 호미 끝에 돌자갈이 걸려 손길이 떨리고 눈물이 퉁퉁 떨어져 콩잎을 다 적신다. 김용택의 [섬진강 23] 일부분 김용택 시인은 평소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신은 어머니의 말씀을 그대로 시에 옮겨 적는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둘을 비교해서 읽어보시면 독백이 구체화되지 않은 앞의 시가 얼마나 공허한 메아리에 그치고 마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시(詩)라는 포근한 그릇에/곱게곱게 담아보고 싶다"는 꿈을 하루 바삐 수정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포근한' 이외에도 시의 그릇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곱게곱게'라는 방법 말고도 시의 형식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소박한 생각이 때로 서투른 경직성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고통스럽게 글을 쓰려고 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글을 쓰고 안 쓰고는 순전히 나의 마음이다"는 생각이 위험해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글쓰기는 고통의 즐거움을 깨닫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세계 인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시를 읽고 쓰는 것은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 일조를 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지금이 술 한
잔 거나하게 걸치고 달빛 아래에서 시 한 수 읊는 음풍농월의 시절은 아니니까요. 시인의 위대성은 이미 굳어진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하는 데서 나옵니다. 시인은 아름다운 것을 찾아 시를 쓰지만 그 아름다움의 정체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시를 쓰는 일은 아름다움의 상투성하고 싸우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모기]라는 시를 읽으며 저는 솔직히 좀 슬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분수를 모르는 불쌍하고 힘없는 것 몸집은 작으면서 소리는 엄청 크고 더러우면서 더럽지 않은 듯 소중한 피만 빨고 테러범처럼 목숨이 아깝지 않은지 마구 덤빈다 장광규 님, 여기쯤에서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인간에게 인간의 삶이 있다면 모기에게도 모기의 삶이 있지 않을까요? 모기는 더럽고 인간은 더럽지 않은가요? 시는 오히려 불쌍하고 힘없는 것의 편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테러범이 목숨을 가볍게 보았기 때문에 테러라는 극한 상황에 자신의 몸을 던졌을까요? 

시인 안도현 님의 월요 촌평 - 2001년 12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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