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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며 느끼며

가을에 띄우는 편지 / 장광규(張光圭)

by 청심(靑心) 2005. 9. 21.

 

차로! 정말 오랜만일세. 
자네에게 편지를 쓴다는 일이 쉬울 것 같았는데, 이렇게 어려울 줄은 미처 몰랐네. 멀리서 가까이서 무언의 대화는
계속하고 있었지만, 세월이 흐를 만큼 흐른 지금 지면에 글을 적어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여 보내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을 전하려 하니 반갑기만 하다네. 

추분이 지나고 기온도 떨어지더니 파란 하늘이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더군. 이맘때쯤이면 고향의 들녘은 황금빛
풍요로움으로 가득 차 있겠지. 차로! 자네는 항상 고향을 잊지 못하고 살아간 댔지. 어린 시절 꿈을 키워가던 고향. 신체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마음의 넉넉함까지 가져다준 고향. 철없이 지낸 그때의 추억들은 가슴속에 생생히 남아  쉬고 있겠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보려는 자네는 욕심쟁이. 마도로스가 되고 싶어 해양학교에 응시했으나 예상외로 낙방이 되어 목포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와야만 했고, 사춘기 시절에는 남을 웃기는 코미디언이 되겠다며 무작정 상경하여 배우 학원을 기웃거리기도 했고, 군대생활을 하면서는 자원해서 월남 전선에 뛰어들었던 자네의 일들이 이제는 다 지나간 이야기가 되고 말았네. 

군대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자네는 농사일을 하겠다며 한동안 고집을 부렸지만, 우리들 걱정은 하지 말고
도회지로 나가 하고 싶은 일 해보라는 부모님 말씀을 따라야만 했고, 서울로 올라온 자네는 무진장 고생도 했었지.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막노동판에도 나가게 되었고, 통금시간에 걸려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며 보리밥을 먹기도 했다지. 그러나 겪었던 모든 일들이 좋은 경험이 되어 지금,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도록 마음속에다 정리정돈을 해놓고 있겠지. 

서른 살을 넘겨야 장가들겠다던 점쟁이 말이 맞았는지, 결혼하자는 여자가 쉽사리 나타나지 않아 자네는 비교적 늦게
결혼을 하게 되었지. 그러나 이제는 두 아이들이 군대생활도 마치고 큰아들은 취직이 되어 직장에 잘 다니고, 작은아들도 올해 졸업반으로 취업준비를 하고 있으니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고 많은 걸 가져다 주기도 했네. 자네 집사람도 열심히 노력해 남 부럽지 않게 집 장만도 하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으니 그 정도면 큰 욕심부리지 않아도 될 걸세. "이렇게 사는 게 아닌데" , "이게 아닌데"하며 자네는 먼 하늘을 바라보겠지. 그런 게 행복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네. 유행가 '대머리 총각'을 즐겨 부른 탓만은 아닌 유전에 의한 것이기는 해도, 머리카락이 빠져 볼품없이 되어버린 자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자네를 보고 웃는 사람이 많다니, 코미디언은 못되었어도 남을 웃기고 다니니 정말 잘된 일일세. 남보다 진하게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기에 속으로 울고 속으로 웃는다는 자네. 아침저녁으로 전철을 이용할 때는 혼자만의 시간에 멍청히 무얼 생각하는지. 자네의 진실은 자네와 하늘 그리고 땅이나 알지 누가 알겠는가? 

차로! 
우리가 어느덧 노년이라 부르는 나이가 되었지만, 마음만은 늘 푸르게 간직하세. 그리하여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 그리고 거리의 많은 인파 속에다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며 조금은 어수룩하고 조금은 모자란 듯 보여도 알맹이 있는 삶을 살아보자고. 우리들 삶의 이야기가 꼬막 껍데기에 주워 담아 하나가 못 될지라도 항상 새로 시작하는 기분으로 열심히 살아가자고. 또 소식 전할게. 안녕. 

                                                                         2005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