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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며 느끼며

가을이기에 / 장광규(張光圭)

by 청심(靑心) 2005. 9. 21.

책을 가까이하는 편은 아니지만 책을 펴 들면 졸음이 온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성미 탓인지는 몰라도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기억이 없다. 신문은 가까이하는 편인데 오래된 것을 읽으면 재미가 있더라. 

얼마 전, 사내 도서실 문을 두드리고 <이해인 시집> 한 권을 빌려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는 시인의

작품세계는 어떤 것일까? 무엇이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에 차있었기 때문이다. 총 3권으로 되어 있는

시집인데, 제1권 「민들레의 영토」였다. 몇 페이지를 읽어본 나는 실망을 했다. 시인이 쓴 글이 초등학생이 쓴 글처럼

너무나 정직하고, 맑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졸음이 온다. 그만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기왕

가져왔으니 끝까지 읽어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해 갔다. 처음과는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닿는 무엇을 느낄

수 있어 제2권 「내 영혼에 불을 놓아」, 제3권「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까지 마저 읽을 수 있었다.

색종이로 오려 붙이듯 아름다운 말만 골라 늘어놓은 그런 글이 아니고, 화장하지 않은 미인의 모습 같은 걸 보여준 때

묻지 않은 언어의 신선함을 담은 글이라고 느꼈다. 이해인 수녀, 그녀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머리로

외워 두었다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개발한 기법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쓰는 시인이라는 뜻 이리라.

군대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훈련소에서 기본교육을 마치고 통신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가을이었다. 단풍도 직각으로 떨어져야 

만큼 엄한 군기 속에 하루하루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과 시간에 나도 모르게 글을 쓰게 되었다.

말하자면 시 같은 걸 썼나 보다. 한참 쓰고 있는데 교관이 다가와 빼앗아 가 버렸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조교한테

끌려가 지긋지긋한 기합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초조했다. 그러나 교관은 읽어보고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나더러 나와서 읽어보란다. 다 읽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 뒤론 그 교관이 들어오는 시간에 읽기

위해 시인 아닌 시인이 되어 휴식시간, 식사시간 등 틈 나는 대로 열심히 글을 써야만 했다. 가을이 가져다준 계절적인

요인 때문에 교관도 나도 전우도 시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군대생활을 마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시골에 있을 때 K방송국 교양프로에 글을 보내 몇 푼의 고료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런 이유로 전통혼례를 올리는 친구들의 결혼 축사를 맡아야만 했다. 가을철에 많이 하게 되는 전통혼례는

신랑 측에서 신부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때 축사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주례사인 셈이다. 친구의 결혼날짜가 잡히게 되면 며칠밤을 설쳐가며 글을 쓴다. 그리고 결혼식 날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신부집 마당에서 텁텁한 막걸리로 목을 가다듬고 나름대로 멋을 내가며 축사를 읽어간다. 신랑

신부의 행복을 진정한 마음으로 빌어주는 서투른 듯, 어색한 듯 꾸밈없는 글들을 말이다.

아름답게만 만들거나 어렵게 만들어 읽히지 않는 책에다 적어두는 글보다 같이 웃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이러한

들이 진정한 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들이 말할 수 있고, 그릴 수 있고, 웃을 수만 있다면

형식이나 기법 따위는 큰 문제가 안 된다. 본 대로 느낀 대로 나타낸 글들이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져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다.
가을은 누구나 시인이 되는 계절이라고 한다. 논과 밭에는 농부들이 멋진 작품을 만들어 놓고 있다. 산들바람도

불어온다. 원고지라도 몇 장 들고 익어가는 가을 들녘으로 나가보자.

                                                          1986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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