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가까이하는 편은 아니지만 책을 펴 들면 졸음이 온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성미 탓인지는 몰라도 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기억이 없다. 신문은 가까이하는 편인데 오래된 것을 읽으면 재미가 있더라.
얼마 전, 사내 도서실 문을 두드리고 <이해인 시집> 한 권을 빌려 가지고 온 적이 있었다. 내가 모르고 있는 시인의 작품세계는 어떤 것일까? 무엇이 발견되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에 차있었기 때문이다. 총 3권으로 되어 있는 시집인데, 제1권 「민들레의 영토」였다. 몇 페이지를 읽어본 나는 실망을 했다. 시인이 쓴 글이 초등학생이 쓴 글처럼 너무나 정직하고 맑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졸음이 온다. 그만 읽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기왕 가져왔으니 끝까지 읽어 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해 갔다. 처음과는 달리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에 와닿는 무엇을 느낄 수 있어 제2권 「내 영혼에 불을 놓아」, 제3권「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까지 마저 읽을 수 있었다.
색종이로 오려 붙이듯 아름다운 말만 골라 늘어놓은 그런 글이 아니고, 화장하지 않은 미인의 모습 같은 걸 보여준 때묻지 않은 언어의 신선함을 담은 글이라고 느꼈다. 이해인 수녀, 그녀 자신은 시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머리로 외워 두었다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개발한 기법으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글을 쓰는 시인이라는 뜻 이리라.
군대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훈련소에서 기본교육을 마치고 통신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되었는데 가을이었다. 단풍도 직각으로 떨어져야 할 만큼 엄한 군기 속에 하루하루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과 시간에 나도 모르게 글을 쓰게 되었다.말하자면 시 같은 걸 썼나 보다. 한참 쓰고 있는데 교관이 다가와 빼앗아 가 버렸다. 그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조교한테 끌려가 지긋지긋한 기합을 받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초조했다. 그러나 교관은 읽어보고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나더러 나와서 읽어보란다. 다 읽었다고 생각되었을 때 박수소리가 들렸다. 그 뒤론 그 교관이 들어오는 시간에 읽기 위해 시인 아닌 시인이 되어 휴식시간, 식사시간 등 틈 나는 대로 열심히 글을 써야만 했다. 가을이 가져다준 계절적인 요인 때문에 교관도 나도 전우도 시인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군대생활을 마치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며 시골에 있을 때 K방송국 교양프로에 글을 보내 몇 푼의 고료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런 이유로 전통혼례를 올리는 친구들의 결혼 축사를 맡아야만 했다. 가을철에 많이 하게 되는 전통혼례는 신랑 측에서 신부집으로 가서 결혼식을 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때 축사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주례사인 셈이다. 친구의 결혼날짜가 잡히게 되면 며칠밤을 설쳐가며 글을 쓴다. 그리고 결혼식 날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신부집 마당에서 텁텁한 막걸리로 목을 가다듬고 나름대로 멋을 내가며 축사를 읽어간다. 신랑 신부의 행복을 진정한 마음으로 빌어주는 서투른 듯, 어색한 듯 꾸밈없는 글들을 말이다.
아름답게만 만들거나 어렵게 만들어 읽히지 않는 책에다 적어두는 글보다 같이 웃고, 느끼고, 즐길 수 있는 이러한 글들이 진정한 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들이 말할 수 있고, 그릴 수 있고, 웃을 수만 있다면 형식이나 기법 따위는 큰 문제가 안 된다. 본 대로 느낀 대로 나타낸 글들이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져 가까이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이다.
가을은 누구나 시인이 되는 계절이라고 한다. 논과 밭에는 농부들이 멋진 작품을 만들어 놓고 있다. 산들바람도 불어온다. 원고지라도 몇 장 들고 익어가는 가을 들녘으로 나가보자.
1986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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