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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오호

내가 만난 사람들 / 장광규(張光圭)

by 청심(靑心) 2010. 8. 23.

 

 

처음 보는 사람도 정이 가는 사람도 있고, 오래 만나며 살아도 불편한 사람이 있다. 보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만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자주 보면서 지내야 하는 사이일 수도 있다. 사람이기에 그렇다. 성인군자가 아닌 이상 사람에 따라 좋은 감정일 수도 혹은 좋지 못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 첫인상이 중요하다. 첫인상이 좋으면 그 기억이 오래 머릿속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을 한 번 보고 곧바로 단정 짓는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기도 하다. 함께 오래 지내다 보면 그 사람의 마음과 태도를 볼 수 있어 진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만남이지만 나에게 좋은 인연으로 다가온 사람들이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잊을 수 없는 영원히 간직하고픈 사람들이다. 

군대생활을 할 때 이야기부터 꺼내야겠다.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강원도 최전방으로 배치를 받았다. 동네 선배들이나
친구들이 월남에 가는 걸 보고 입대 전부터 나도 월남에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곳에 가자마자 월남에 보내달라고 자원을 했다. 그런데 중대장이 그걸 알고는 절대로 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월남에 가게 되면 살아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 가지 말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가만히 근무하고 있으면 행정반에 자리 하나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월남으로 가 있었다. 담당에게 중대장이 감춰버린 피복 등 반납을 부탁하고 오옴리에서 훈련을 받고 월남에 갈 수 있었다. 월남에서 근무하며 그 중대장과 몇 번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월남에서 내 주특기인 무선 통신병으로 소대에서 근무하였다. 무전기로 교신하면서 얼굴은 한 번도 대하지 못했지만
좋은 느낌으로 지낸 전우들이 있다. 그중에는 귀국 후 제대하면 서로 만나며 지내자는 전우들이 생각나기도 한다. 서로 주소라도 교환했어야 했는데 총소리 대포소리와 함께 지내는 곳이어서 그런 여유는 찾지 못했던 것 같다. 군대생활 얼마 안 되어 월남에 파병되어 그곳은 나에게 모두 군대 선임이었다. 작전 중 전과가 있거나 우수한 병사를 포상하는 기회가 있었는데 선임들이 강력히 나를 추천하기도 했다. 지휘관이 신참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니 이번에는 선임이 받아야 한다며 선임에게 행운을 안겨주고 말았다. 함께 근무하며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준 월남 파병 선배들도 잊을 수 없다. 중대본부로 올라가 근무하던 중 몸이 아파 얼마 동안 병원에 입원한 일이 있었다. 그곳에서 한 전우와 친하게 지냈는데 주월사령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자기가 힘을 써 나도 주월사령부에서 근무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했다. 실제로 병원에 있는 동안 주월사까지 동행해 업무를 설명도 해주고 담당과장에게 인사도 시켰다. 사진 촬영병으로 근무하게 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전우 친 매형이 바로 주월사의 인사과장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내가 카메라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어 퇴원하면서 애당초 근무하던 부대로 복귀하고 말았다. 그 전우는 나를 원망도 하고 서운한 생각을 많이 했을 것 같아 지금도 아쉽고 미안하다. 

일 년간의 월남 근무를 무사히 끝내고 귀국했을 때 군생활이 일 년 남짓 남았는데 최전방으로 가게 되었다.
103보충대를 거치고 사단 보충대를 거치고 연대 보충대를 거치며 배치부대로 가고 있는 중에 창설부대가 생기는 서울로 발령이 났다. 왔던 길 되돌아 나오던 중 어느 보충대에서 신상기록부를 작성하면서 일행 중에 생년월일이 같은 병사를 만나게 되었다. 같은 계급에 같은 나이에 성명만 다른 사람을 그곳에서 만난 것이다. 하늘 아래 생년월일이 똑같은 사람이 여러 명 있을 수 있겠지만, 한자리에서 우연히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에 서로가 생년월일을 확인하며 한바탕 웃기도 했다. 

제대를 하고 고향에서 지내다 서울로 올라와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어렵게 생활하던 중 결혼을 하였다. 몇 군데
옮기며 조금은 경험과 경력이 생기면서 급료가 오르긴 했지만 모든 것이 부족한 생활이었다. 이때 처남 중에 한 사람이 자기가 다니는 회사를 추천해 주었다. 실기시험을 치르고 면접을 보고 우여곡절 끝에 입사가 결정되었다. 사실 입사하려는 회사에서 하는 일에 경험도 없고 자신도 없어 망설이다 큰마음먹고 입사를 하였다. 석유파동으로 인해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아 쉬는 날이 많아 월급이 줄어드는 게 걱정거리가 된 적도 있었다. 휴무로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집주인이 젊은 사람이 집에서 놀고 있으면 어떡하냐며 걱정을 한다. 아들이 건설회사에 다니는데 해외에 나가 몇 년 고생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며 아들에게 부탁을 하겠다고 했다. 집주인의 아들이 내가 원하면 빠른 시일 안에 해외로 나갈 수 있게 해주겠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며칠을 두고 고민을 했다. 아내는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고 해외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돈보다는 건강을 생각하자며 해외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다니던 회사에 계속 다니기로 했다. 회사에 적응하며 사보 편집위원이 되어 부족한 솜씨지만 써보고 싶었던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처남을 통해 입사를 하고, 처남과 함께 다니다, 처남과 함께 퇴사를 하였다. 원래 말이 없어 제대로 표현은 안 하지만, 항상 그 처남한테 고맙게 생각하며 가까운 거리에서 가깝게 지내고 있다. 

살아오면서 만났던 사람들마다 어찌 사연이 없겠는가. 배움의 길을 연결해 주려고 힘써 준 형뻘 되는 사람, 상급학교에
진학하라며 학비를 대주겠다던 아저씨. 부모님에게 소개를 했다며 자기 집으로 함께 가 인사하자던 이름 모를 아가씨도 떠오른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를 도와주려고 따뜻하고 진실된 마음을 베푼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적절히 대응을 못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기도 한다. 지금 일하는 곳에 생일이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 물론 나이는 다르지만 생일이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특별한 만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쉽게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며 사는 게 현실이다. 생일이 같은 사람을 날마다 같은 장소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누구와 어디서 만나 어떤 인연으로 지내다 어떻게 헤어질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가 웃으며 만나 좋은 기억으로 남는 인연을 만들어 가도록 보람 있는 생활을 해야겠다. 

                                                                2010년 8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