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대신 기름을 먹지요. 도로 위를 굴러 다니지요. 사치품이 아니라 생활의 필수품이 되어 사람들 곁에서 사랑을 받게 된지도 오래되었지요. 나는 갈색 피부를 가진 승용차입니다. 서울의 한 주택단지에서 살고 있지요. 여의도 국회의사당도 63 빌딩도 가까이 보이고 영등포 역도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 집 아저씨가 왜 나를 택했는지 아세요? 우선 이름이 마음에 들고 너무 크지 않아 기름을 적게 먹으니까 나를 선택했다더군요. 그리고 아저씨가 아저씨의 이름으로 승용차를 구입한 것은 내가 처음이라는데 그럴만한 사연이 있더군요.
숨겨두었던 첫 번째 사연은 이렇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 빈 달구지를 타고 놀다 낭떠러지로 굴렀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고 누군가가 업어서 집으로 옮겼다지요. 의식을 잃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한없이 누워만 있었답니다. 아마 하늘나라로 갈지도 모른다며 친인척이 다녀가기도 하고 어수선한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답니다. 다행히 한 달여 만에 의식을 되찾았답니다. 그 후론 바퀴 달린 물건은 만지기도 싫고 타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두 번째 사연입니다.
형님이 한 분 있는데 결혼 적령기가 되어 선을 보게 되었답니다. 객지에서 운전을 하고 있었고, 선을 볼 때마다 아가씨 쪽에서 퇴짜를 놓곤 했답니다. 이유는 위험한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함께 다녀온 어머니는 우리 아저씨에게 '너는 커서 운전은 절대로 하지 말아라.' 하시며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시곤 했답니다. 형님의 맞선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께서 운전 이야기를 꺼내시면 일이 잘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답니다. 우리 아저씨는 그럴 때마다 운전을 해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지키는 것이 작은 효심이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러기에 지키려 무척 노력했답니다. 군 복무 때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꾹 참았답니다. 제대 후 운전학원에서 편지가 자주 왔지만 못 본 척했답니다. 다른 친구들이 운전학원을 찾아갈 때도 우리 아저씨는 흔들리지 않았답니다.
세월이 흘러 농촌을 떠나 도시로 나가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답니다. 그 무렵 아저씨도 서울로 올라 온 겁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동차 제조회사에 취직이 되리라는 것을. 물론 차를 만드는 곳에서 운전을 할 줄 모르면서 회사에 다니느라 남 모를 고민도 많이 하고 고통도 컸으리라 생각됩니다. 결국 시대의 흐름은 그를 움직였습니다. 아저씨도 어쩔 수 없이 운전면허증을 취득하려고 학원에 등록을 했답니다. 등록하고 며칠 다녔을 때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아저씨의 큰아들이 크게 아파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석 달 남짓 입원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하늘도 아저씨가 운전하는 걸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경고를 줬나 봅니다. 병원을 오가느라 잡혀있는 필기시험도놓쳐버리고, 학원에 다니는 것도 포기한 채 시간은 또 지나갔습니다. 큰아들이 퇴원하고 어느 정도 회복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운전면허증을 취득하게 되었답니다.
운전면허를 따고서도 곧바로 나를 만난 것도 아닙니다. 면허는 가졌지만 승용차 없이 지낼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큰아들과 작은아들이 대학교에 다니게 되었을 때 비로소 승용차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나 봅니다. 그렇게 해서 아마 나를 늦게나마 데리고 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아저씨가 나를 집에 두고 나갈 때나 들어와서도 나에게 다정한 인사를 했습니다. 따뜻한 체온으로 여기저기 보살펴주기도 했답니다. 내 몸의 먼지도 자주 털어주며 무척 사랑을 했답니다. 나에게 초보운전 딱지를 붙이고 다닐 때도 자존심이 상하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나의 몸에 조그마한 상처도 남기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울러 우리 아저씨의 털끝 하나 이상 없이 모시려고 애썼습니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출퇴근으로 세 시간 정도가 걸렸답니다. 물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는 있었겠지요. 하지만 나와 함께 다닐 때에는 다른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았답니다. 오직 나만을 생각하며 움직였답니다. 우리 아저씨가 나만을 생각했듯 나도 우리 아저씨만을 끔찍이 생각했었답니다.
아저씨와 내가 만나 정을 주고받은 지도 꽤 많은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아저씨는 요즘 나와 함께 다니지 않아도 되는 곳에 나가고 있으며 가끔 휴일이면 나를 찾을 뿐입니다. 아저씨의 큰아들은 결혼하여 수원으로 가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 지금은 작은아들이 회사에 출근하면서 매일 나를 데리고 다닙니다. 아저씨가 그러했듯이 작은아들도 나를 무척 아껴줍니다. 누구와 함께 다니든 힘을 다해 안전하게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2008년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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