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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두고 온 산촌 / 장광규(張光圭)

by 청심(靑心) 2005. 9. 21.

 

학교 가는 아이들의 나이에 별로 신경을 안 쓰던 때, 다섯 살에 입학한 형이 너무 어린 탓에 공부도 못하고 학교에 안 가려고 한다며 나에겐 아홉 살쯤 되어서 초등학교에 다니라는 걸, 여덟 살 되던 해 꼭꼭 숨겨둔 옷을 챙겨 입고 혼자서 입학식에 가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 틈에 수십 년이 지나가버렸다.

면사무소가 있고 파출소가 있는 소재지에 전교생이 오백여 명인 시골학교는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 건물은 일본식으로
어버이들이 다닐 때는 사학년까지만 있었고 나머지 학년은 읍내로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남향으로 지어진 교실 앞에는 벚꽃나무 네 그루가 고목이 되어 버티고 서 있었다. 일학년에 입학한 학생의 나이가 열 살이 훨씬 넘는 아이도 있었고 월반이라고 해서 한 해 동안에 일학년에서 이학년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삼학년이나 사학년으로 입학해 그다음 해에 육학년이 되어 이 년 만에 졸업을 하는 일들이 자연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부설 공민학교가 있어서 나이 든 사람들이 오후에 학교에 나와 공부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또 "아는 것이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는 구호를 내걸고 문맹퇴치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마을에선 밤마다 한글을 모르는 어른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한글을 배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학교 가는 길목엔 높지 않은 고개가 하나 있었는데 그 고개에 올라서면 학교 주변 숲 사이로 게양된 태극기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삼베와 무명으로 만들어준 옷을 입고 신발은 고무신, 가방은 생각조차 못하고 보자기에다 책을 싸 가지고 다녔다. 우산도 흔하지 않아서 우산 하나에 서너 명이 함께 쓰고 다니기도 하고 때로는 삿갓을 쓰거나 우장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갑자기 비를 만나면 책보를 등에 동여매고 고무신을 벗어 들고뛰어서 집으로 왔다. 도중에 다리가 없는 개울을 몇 군데 건너게 되는데 신발을 벗지 않고 건너다 불어난 물길에 신발이 떠내려가 잃어버리는 경우를 한두 번은 다 겪었던 일이다. 학교 가는 길은 리어카도 다닐 수 없는 논과 밭으로 둘러싸인 들판길인데, 논두렁 밭두렁에는 땅벌 집이 많아서 여러 번 벌에 쏘이기도 하고 얼굴이 퉁퉁 부어 학교에 못 나오는 아이들도 있었으나, 그래도 등하굣길은 언제나 즐겁고 재미있었다. 봄이면 자운영꽃이 만발한 논에서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윙윙거리는 벌들을 잡기도 하고, 보리가 익어가는 계절이 되면 작은 숲을 이루고 있는 보리밭에서 술래놀이도 하고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기도 했다. 여름이면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흐르는 냇물에 뛰어들어 물장구치며 더위를 씻어내기도 했다. 가을이면 벼 이삭이 익어가는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으며 새떼를 쫓기도 했다.

아침 등교 때면 마을 아이들끼리 모여서 가게 되는데 비교적 높은 위치에 살고 있는 우리 동네는 아침 해가 일찍
솟아오르는 바람에 학교에 일찍 가게 되고 그러다 보니 운동장은 우리들의 차지가 되었다. 놀이터가 마땅히 없는 산골아이들은 학교 운동장이 각종 놀이를 할 수 있는 좋은 장소였는데, 그중에서도 야구 공보다 조금 큰 고무공을 가지고 축구를 하는 것이 제일 재미있었다. 짝만 맞으면 몇 명이라도 좋다. 공을 차기 위해 고무줄로 신발을 동여매고 심판도 없고 규칙도 없는 축구를 한다. 그러면서도 지킬 것은 지키면서 상대편 문에 공을 차 넣으면 되었다.

미술시간이면 크고 작은 소나무가 적당히 서 있는 학교 뒷산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상급학년이 되어서는 산에
가서 땔감을 해다가 난로를 피우기도 하고, 봄가을이면 이름 없는 절터와 허물어져 없어진 성터로 몇 번이고 소풍을 가도 싫증이 나질 않고 갈 때마다 새롭게 느껴졌다. 운동회 날이면 풍선 장수 오징어 장수 얼음과자 장수들이 모여들고, 동네 사람들도 다 모여 산골에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지나간 초등학교 시절이 잘 정돈된 꽃밭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고, 혼자서 입학식에 갔던 마음을 잊지 않으며 지금도 초등학교 일학년이 된 기분으로 살아가고 있다.

농촌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 고향은 마음을 살찌게 해 주고 가끔은 달려가고픈 충동을 주곤 한다. 이제
타향에서 정들 만큼 살았는데도 계절의 감각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것이 향수를 느끼게 하는 큰 이유 중에 하나이다. 고향에서는 계절마다 계절에 맞는 곡식이 논밭에서 자라고 있어 계절의 흐름을 피부로 느낄 수 있고, 맑은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면서 날짜를 기억해 가는 조상들의 순박함을 배울 수도 있었던 것 같다.

마당 한쪽 돌담 옆에는 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고 뒤뜰에는 대나무밭이며 밤나무 대추나무 등이 있어 새들이 지저귄다.
휴일이 따로 없지만 일부러 산과 들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 가까운 곳에 야산이 있고 야산에는 밭이 있어 일하러 가는 것이 산에 가는 것이 된다. 집 근처 들판에 채소며 곡식이 자라고 있어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 장만해서 온 가족이 함께 먹을 수도 있어 자연과 함께 사는 싱그러움 그대로이다. 들녘에 나갈 때도 시계 같은 건 신경을 안 써도 된다. 나무 그림자나 큰 바위 그림자로 시간을 종잡을 수 있고 아침에 해 뜨면 일터로 나가고 해가 질 때면 하루 일을 마치게 된다.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속에는 고향의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이 이렇게 해가
바뀌거나, 명절이 되면 고향생각이 짙게 밀려온다. 고향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 모습은 자꾸 변해가고, 함께 뛰놀던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졌지만 마음속에는 언제나 그때 그대로 남아있다. 찾아가면 포근히 반겨주고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곳이 고향이다.

                                                              1986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