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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오포'라 불렀던 사이렌 / 장광규(張光圭)

by 청심(靑心) 2005. 9. 21.

 

높고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초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그 고개를 넘어 논길을 따라 한참을 가노라면 면사무소가
나온다. 그 옆에는 지서가 있다.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학교가 있다. 그런데 학교를 오가면서 지서 앞에 있는 사이렌이 신기해 쳐다보곤 했다.

면사무소와 지서 앞 길가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고 중간중간에 크나큰 팽나무도 몇 그루 있었다. 넓은
공터였는데 그중 한 곳에 사이렌이 있었다. 나무 중간쯤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 위에 사이렌을 올려놓았던 것이다. 사다리를 설치해 놓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사이렌을 울리게 되어있었다. 이 사이렌은 주로 낮 12시에 시간을 알려줄 목적으로 설치해 놓았던 것이다. 시계가 귀하던 때라 사이렌은 시간을 알려주는 요긴한 수단이 되었다. 나무 위에서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는, 야산을 넘고 골짜기를 타고 나무 사이를 지나 풀숲을 헤치고 논밭에서 일하는 여러 마을로 울려 퍼졌다.

사이렌은 수동식이었는데 사람이 직접 손으로 돌려야 했다. 사이렌은 의용소방대원이나 지서에서 잔심부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담당이었다. 그때의 시계가 정확했을 리 없고, 시간을 놓쳐 늦게 사이렌을 울리거나 아니면 조금 일찍 울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곳에선 나무 그림자나 해 위치를 보고 시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너무 엉뚱하게 울릴 때가 있었으니 말이다. 또한 이곳 지서 앞에서 울리는 사이렌도 있었지만, 20여 리 떨어진 읍내에서도 사이렌이 울렸는데 차이가 많이 나기도 했다. 여러 사정이 있었겠지만 지금처럼 좋은 시계가 없어서도 그랬을 것이다. 읍내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는 높은 곳이나 산으로 올라가야 들을 수 있었다. 가끔 사이렌이 울리지 않아 사이렌 소리를 기다리다 식사시간을 놓쳐 늦은 식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사이렌은 화재가 발생해도 울렸다. 정오를 알릴 때에는 길게 한 번 울리고, 불이 났을 경우는 짧게 여러 번 울렸던 것
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불이 나서 사이렌이 울리면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들은 '오포가 운다', '오포가 분다'라고 했다. 사이렌은 주로 낮 12시에 점심시간을 알릴 때 울렸다. 때문에 어른들은 정오에 울린다 해서 쉽게 '오포'라 했는데, 아이들도 따라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정오에 울려도 '오포' , 불이 나서 울려도 '오포'라 했던 것이다. 공식 명칭이 오포가 아니라 사이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사이렌이 울리면 무의식 중에 오포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들이 울면 소리가 크고 경우에 따라서는 시끄러워 '오포가 운다' 또는 '오포 분다'며 놀리기도 했다. 입을 벌리고 소리를 내서 우는 것이 보기 싫어서도 그랬지만 사이렌 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면 귀가 막힐 정도로 컸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커다란 괘종시계가 벽에 걸리며 시간마다 숫자와 같은 수의 종을 치기 시작했다. 시계의 시간이 제 각각이다
보니 종소리가 앞집에서 뒷집에서 윗집에서 아랫집에서 연속해서 울리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서 밥 먹으라는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시간을 알려주어 고맙게 느껴지던 사이렌 소리는 1960년대 초반쯤에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귓가에 사이렌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하다.

                                                        2009년 2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