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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오호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 장광규(張光圭)

by 청심(靑心) 2005. 9. 21.

 

나뭇잎이 울긋불긋 아름답다. 
지금을 늦가을이라고 부를 거야. 가을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가을이 가고 있군. 이렇듯 좋은 계절은 짧게 지나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하철을 탄다. 어제는 왼쪽에 앉았던 사람이 졸면서 가끔 나를 툭툭 건드리더니 오늘은 오른쪽에 앉은 사람이 졸면서 좌우로 흔드는 바람에 신경이 좀 쓰이더군. 도시 사람들은 앉으면 졸거나, 졸고 있는 시늉이라도 하는 게 습관이 되어가나 보다. 아침 일찍 타거나 밤늦게 타야지만 겨우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하철 안은 많은 인파로 지옥철이 되고 감옥철(?)이 되고 만다. 

고향을 떠나 산다는 것은 엄마 품을 떠난 어린애와 같은 것일까. 고향의 옛 추억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다 그리워진다.
예비군 훈련이 끝나면 쌈직한 술집. 아니 하나뿐인 술집이니까 선택의 여지가 없지. 그곳에 들어가 동전 몇 닢씩 놓으면 기분 좋을 만큼 술잔을 들며 마음의 창을 활짝 열던 소박한 시절도 떠오른다. 이곳에서는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왜 제때에 만나지 못할까. 하는 일도 가지가지이고, 사는 곳도 각기 동서남북이기 때문이리라. 그것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게 큰 이유일 거야. 어릴 적 동네 사랑방에 모이거나, 아니면 아무 곳에서라도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던 그런 모습과 그 친구들이 그립다. 


언젠가 고향에 갔을 때 앞들 논에다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놓고 열심히 일하는 친구를 만났지. 배추를 보기에도 탐스럽게
가꾸어 놓았더군. 그 비닐하우스 안에서 오이를 재배하고, 수박도 재배하고 이젠 배추를 심어놓았단다. 배추를 뽑아내고는 겨울철 딸기를 재배할 생각이란다. 해마다 이런 식으로 비닐하우스 안에서 비교적 많은 돈을 번다고 은근히 자랑을 했다. 


돈이 헤프다는 소리를 많이들 한다. 물가가 오르니까 그러겠지. 지금 전철을 타고 출근하고 있는 것도 돈을 만들기
위해서다. 돈을 벌기 위해서 일을 한다. 일은 자동차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만든다고 표현해야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쓰지 않으면 벌 필요도 없을 텐데 말이야.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그렇지. 쓰지 않으려면 가만히 있으면 되겠지. 그렇지만 그게 어디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짓인가. 

고향에 갔을 때 만난 그 친구도 농촌생활을 정리하고 도시로 나갈까 생각 중이라고 했지. 고향을 버릴 건가.
잊으려는 건가. 나도 고향에 있을 땐 막연하게 도시가 좋아 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도시생활에 익숙하지 못한 탓인지 고향의 모든 이 다 그리워진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돌멩이며,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잡초들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동네 뒷산에서 흙과 나무 한 그루 가져다 화분에 심고, 다른 화분에는 고추와 배추 등 채소도 심어놓고 고향냄새를 맡으며 생활하고 있는 내 심정을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단풍이 한 잎 두 잎 뚝뚝 떨어진다. 
겨울을 준비하는 소리다. 또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고민하며 생각에 잠긴다. 쓸쓸함과 허무함을 느끼고
있는 게 계절 탓이라고만 가볍게 넘겨버릴까. 아니다. 뭔가 변해도 많이 변해가고 있다. 

                                                            1996년 가을